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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공부

조선 태조와 태종, 서로 상반된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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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진력 있고 목적의식이 뚜렷한 태종

태조는 조선의 왕이 되기까지 양가감정에 시달리며 일관되지 않은 행동을 했지만, 태종의 경우 모든 상황을 정면으로 돒하고 권력에 대한 야심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태종은 추진력 있고 목적의식이 뚜렷하기 때문에 과단성과 결단력이 있었고 후회나 뒤끝이 없었습니다. 

 

태조와 태종, 둘 다 왕위를 한차례 고사했으나 이유는 달라

조민수가 실각한 뒤 사람들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지만, 이성계는 사양했습니다. 1차 왕자의 난 뒤 사람들은 이방원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지만, 이방원도 사양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왕으로 추대 받았을 때 똑같이 사양했지만 그 이유는 전혀 다릅니다. 이성계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이라면, 이방원은 더 좋은 때를 기다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성계는 자신이 더 이상 선택을 할 수 없을 때까지 몰리다가 왕이 '된' 것이고, 이방원의 경우는 확신하며 왕을 '한' 것입니다.

 

태조 vs 태종, 왕이 된 뒤

태조의 갈등과 태종의 확신은 왕이 된 뒤에도 뚜렷이 나타납니다. 태조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큰 계획이 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정도전에게, 집안에서는 부인 강씨에게 끌려다니다가 세자 책봉도 이들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왕위에 오른 바로 다음 해에 성급하게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입니다. 결국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왕자의 난이라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지혜롭게 수습하기보다는 왕위를 성급하게 물려주는 쪽을 선택합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선위했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왕위에서 물러난 뒤 10년 동안 건강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태종의 경우도 세자 책봉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큰아들 양녕대군을 일찍부터 세자로 책봉했지만, 양녕이 왕이 될 자질이 아니라고 판단했기에 폐세자를 결단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태조와 다르게 태종은 오랜 시간을 두고 조심스럽게 진행했으며,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의사를 표시하며 예상되는 모든 문제의 소지를 없애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충녕대군에게 세자 교육을 철저히 했으며, 충녕대군이 세종으로 직위한 뒤에도 자신이 죽는 날까지 왕권 안정을 위해 힘썼습니다. 

 

수도를 옮길 때도 태종은 왕이 된 후 한양 천도를 추진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개경의 덕이 약해졌다는 도참설과 고려시대부터 유행하던 한양 명당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대로 준비도 없이 급하게 천도한 덕분에 1년 동안 임시거처에서 지내기도 했었습니다. 심지어 이 결정은 1차 왕자의 난 이후, 다시 번복됩니다. 수도가 한양에서 개경으로 다시 바뀐 것이지요. 반면 태종은 왕이 된 뒤에도 여러 상황을 고려하며 철저하게 재천도를 결정해 한양으로 재천도하고, 한양은 조선의 수도로 자리잡게 됐습니다. 

 

함흥차사의 유래

태조는 1차 왕자의 난과 개경 재천도 후 거처를 고향 함흥으로 옮겼습니다. 태종은 이런 태조를 다시 궁으로 모셔오려고 했으나, 이성계는 계속해서 고집을 피우며 함흥에 머물렀습니다. 심지어 설득하러 오는 살마들을 활로 쏘아 죽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함흥으로 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서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아들과 양가감정이 특징인 아버지와의 싸움에서 아버지는 당연히 질 수밖에 없었고 태조는 태종에게 돌아왔다고 합니다.

 

 

약한 아버지와 강한 아들

이렇게 태종과 태조는 상반된 성격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조를 못난 사람으로 해석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태조는 그저 왕이라는 자리와 맞지 않은 성격이었을 뿐이고, 이방원은 왕의 자리에 적합한 성격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맞습니다. 가장으로 따지자면 태조는 자신의 아내를 무척 사랑했고, 자신을 힘들게 했던 태종에게 보복하지 않고 모든 것을 용서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반면 태종은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왕후와 그의 가족들을 모질게 대했을 뿐 아니라, 외척을 막는다는 이유로 후궁을 계속 들이고, 처남도 넷이나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태종에게는 오직 왕권 강화만이 중요했습니다. 아버지로서도 훌륭한 아버지는 아니었습니다. 자질이 없다는 이유로 양녕대군을 과감히 내치고, 충녕을 세자로 삼았습니다.

 

또한 사람의 성격은 노력이나 의지보다 주변 환경이 더 강력하게 작용하기도 합니다. 우선 태조 이성계는 첫째였습니다. 이복형 이원계가 있긴 했지만 큰아들의 부담은 이성계가 모두 지고 있다고 보는 게 맞겠습니다. 첫째들은 어렸을 때부터 '책임'이라는 말을 듣고 자라기 때문에 행동하기 전에 충분한 생각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마음 속에 많은 갈등이 생기고 우유부단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성계는 무사이기도 했습니다. 수십 년간 전쟁을 하면 사람을 강하게 만들 것 같지만 실제로는 반대가 됩니다. 끊임없이 사람을 죽이는 전쟁을 치를수록 사람은 겸손해지고 약해집니다.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되며 자신의 결정에 따라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 태종은 다섯째 아들이었습니다. 그것도 고려의 떠오르는 영웅 이성계의 아들. 동생은 늘 형을 이기고 싶어합니다. 이방원에게도 '책임'보다는 '경쟁'이 인생의 주제였던 셈입니다. 

 

 

출처. 심리학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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